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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담합, 모두가 지는 게임(MBC)

대강, KTX, LNG 주배관공사...

총 22조원의 세금이 투입된 대형국책공사에서 건설사들의 담합이 잇달아 적발됐습니다.

나눠먹기를 일삼아온 건설사들의 비도덕적 관행이 가장 큰 문제.

여기에 담합을 조장해온 최저가 낙찰제와 1사1공구제등 제도적 허점도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해외입찰 자격마저 제한받게 된 한국 건설사의 위기,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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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서울 강남의 한 카페.

22개 국내 유명 건설업체 직원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100원짜리 동전에 1부터 17까지 숫자를 쓰고 봉투에 넣어 하나씩 뽑았습니다.

한국가스공사가 17개 구간으로 나눠 발주한 천연가스 주배관 공사에서 입찰공구를 먼저 고를 수 있는 우선순위를 가리기 위한 겁니다.

[김웅희 경위 / 서울지방경찰청]
"가장 수익이 많이 나고 편안한 공구 등을 1번을 뽑으면 먼저 고르고, (나머지) 16개 공구를 가지고 2번이 다시 고르고 이런 형태로 반복적으로 들어간 거죠."

업체별 입찰공구를 정한 뒤엔 서로 들러리를 서주기로 약속했습니다.

한 공구에 한 업체만 들어가면 입찰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건설사 관계자]
"유찰이 되면 이 공사를 할 수 없으니까 나머지 한 업체를 들러리로 데려가던 관행이 있었죠."

그리고 입찰 당일.

낙찰받기로 한 건설사 직원이 USB를 들고 들러리 업체에 나타났습니다.

USB에 들어있는 건 낙찰예정업체가 미리 작성한 들러리용 견적서.

컴퓨터로 응찰하는 과정을 눈앞에서 확인한 겁니다.

[김웅희 경위 / 서울지방경찰청]
"낙찰받기로 했는데 (다른 업체가) 자기들보다 좋은 조건으로 써가지고 반칙을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낙찰하고 나면 끝이니까. 그래서 영업 직원들을 보내서 현장에서 확인하고 USB 회수하고 다시 오는 겁니다. 못 믿기 때문에"

2조1천3백억 원짜리 국책 사업의 수주 업체는 이렇게 아이들 놀이처럼 정해졌습니다.

이 담합으로 통상적인 수준보다 3천억 원이나 많은 공사비를 받아 챙긴 22개 건설사들에게는 지난 7일, 1천7백여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됐습니다.

공정한 경쟁 없이 짬짜미를 통해 건설사들의 배를 불리는 담합.

특히 국가나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사업의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낭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4대강과 KTX등 대규모 국책 사업마다 건설사들의 담합은 뿌리 깊은 고질병처럼 계속돼 왔습니다.

지난달 개통한 호남선 KTX.

서울에서 광주까지 1시간 33분,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상 경제적 효과 25조 원, 총 사업비 8조3천5백억 원이 투입된 초대형 국가 프로젝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사회문화적인 교류와 협력을 촉진해 국토 균형발전에 큰 획을 그을 것입니다"

하지만 호남선 KTX는 '담합 고속철'이란 오명을 쓰고 말았습니다.

오송에서 송정까지 185km 구간의 19개 공구와 차량기지 공사 등 20개 공사 운데 18개 공사에서 입찰 담합이 적발된 겁니다.

가담한 건설업체는 28개.

역시 제비뽑기로 수주업체를 정한 뒤 서로 들러리를 서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정중원 상임위원 / 공정거래위원회 (2014.07.24.)]
"28개 회사가 똘똘 뭉쳐서 하나의 이탈자도 없이 얼마나 견고한 카르텔을 하고 있는지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천억 원대 차량기지 공사 수주 업체는 사다리타기로 결정됐습니다.

삼성물산, 대우건설, 대림산업 직원들이 모여 공사 입찰 가격 3개를 미리 정하고 그 자리에서 사다리타기를 통해 각 회사가 어떤 가격을 써낼지 나눈 겁니다.

입찰 당일엔 역시 서로를 감시했습니다.

[정중원 상임위원 / 공정거래위원회 (2014.07.24.)]
"사다리 타기로 뽑은 투찰률 대로 투찰을 했는지 여부를 확인까지, 경쟁사 직원들을 참관을 해서.."

2012년부터 최근까지 공정위에 적발된 건설 담합은 32건, 업체는 50개가 넘습니다.

호남선 KTX 공사 4355억 원, 천연가스 주배관 공사 1746억 원, 인천지하철 2호선 공사 1320억 원 등

담합한 건설사들에 부과된 과징금만 1조2천3백억 원에 달합니다.

이렇게 건설사 담합이 계속되는 이유는 뭘까?

[김영덕 박사 / 건설산업연구원]
"공급하는 업체가 한정적이니까 자기네들끼리 담합을 할 수밖에 없거든요. 실제로 대형 국책 공사들 같은 경우에는 대형 업체들만의 시장입니다. 대형 공사들이 한꺼번에 발주가 되면 사실은 나눠먹기 식이 가능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요"

건설사들이 담합을 오래된 관행이나 습관처럼 당연시 하며 이익을 얻기 위해 별 죄의식 없이 계속하고 있다는 겁니다.

[권오인 팀장 / 경실련]
"공사비 부풀리기 문제라든지 불법 하도급 문제라든지 입찰 담합 문제라든지 다양한 방면에서 불법, 비윤리적인 일들이 많이 나타났고요. 건설사 스스로 이런 것들을 근절하기 위한 시도들이 좀 부족하지 않나."

담합의 1차적인 책임은 건설사에 있습니다.

하지만 담합이 건설업계 오래된 관행인 만큼 정부가 이를 미리 예측하고 방지하기 위한 제도를 만드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입찰 제도를 들여다보면 담합을 막기 보다는 오히려 담합을 조장하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22조 원의 예산이 투입된 이명박 정부 최대역점사업 4대강 공사.

당시 정부는 임기 내 조기완공을 위해 전체 공사를 여러 공구로 쪼갠 뒤 한 업체가 하나의 공구만 낙찰받아 시공하는 '1사1공구제'로 공사를 발주했습니다.

특정 회사에 일감이 몰리는 것을 막고 공사기간을 단축하는 장점이 있지만 한 건설사가 1개의 공구만 맡을 수 있기 때문에 건설사들이 여러 공구에서 경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담합을 유도하는 제도라는 겁니다.

[김영덕 박사 / 건설산업연구원]
"입찰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본설계를 하게 되는데 그 설계비용이 만만치 않게 큽니다. 1사 1공구제에서 여러 개 공사를 한꺼번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히 초기 비용이 많을 수밖에 없죠. 그러다보니까 서로 사전에 협의를 통해서 나누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거죠"

공사 가격을 결정하는 '실적공사비제'와 '최저가낙찰제'도 마찬가지

실적공사비제도는 공사를 발주할 때 과거 다른 공사의 낙찰가격을 기준으로 예산을 산출하는 것인데,

이것이 반복되면서 물가나 원자재값 등 현실과 상관없이 공사비만 점점 떨어뜨리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김정희 / 국토교통부 건설경제과장]
"100을 생각했는데 80에 계약이 되잖아요. 그러면 그 80에 계약된 그걸 기준으로 해서 다시 설계 금액을 산출하면 계속 내려갈 수밖에 없는 구조죠. 물가상승률은 올라가는데 기준 금액을 산출하는 산출의 기준은 마이너스로 가는 그런 것 때문에 도입된지 10년 지났는데 현실하고 너무 멀어져버린 거예요"

이렇게 이미 낮게 책정된 기준 가격에서 다시 최저가 입찰로 경쟁하다보니
건설사들이 적자를 피하기 위해 담합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건설사 관계자]
"일종의 신사협정처럼 '야, 이거 어차피 돈 안되는 공사다. 어차피 이거 밑지는 공사인데 우리 같이 죽지는 말자. 수주 한 놈은 살아야 되지 않겠냐, 어찌됐건. 그러니 가격을 가지고 가뜩이나 돈도 안 들어오는 공사에 내려가지 말자' 하는 거죠"

최저가 낙찰제의 문제점은 또 있습니다.

강원도 강릉의 한 도로 건설 현장.

오는 2017년 완공 예정인데, 벌써 다섯 달째 공사가 중단됐습니다.

시공을 맡은 동부건설이 지난 연말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공사를 포기한 겁니다.

[전병희 감리단장]
"예상되는 적자 규모가 한 120억 원 정도 됩니다. 특히 자재비, 아스콘, 레미콘 이런 게 많이 올랐기 때문에 그정도 적자가 납니다"

발주처가 제시한 예정가격은 1천2백억 원.

하지만 동부건설은 최저가 낙찰제를 통해 예정가의 56%인 670억 원에 수주했습니다.

정상적인 공사가 불가능한 금액이라는 건 발주처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최재기 시설주사 / 원주국토관리청]
"원가 관리를 아무리 잘한다고 하더라도 56%가지고 하기는 힘들죠. 현장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다 보니까 민원도 좀 많이 발생하게 되고 그런 걸 관리하는 저희 청 입장에서도 힘들고.."

적자가 뻔한 현장이다 보니
이 공사를 이어받겠다고 나서는 업체도 없습니다.

그동안 장비나 자재를 납품해온 하청업체들도 '단가 후려치기'에 시달렸습니다.

[김형득 / 덤프트럭 기사]
"저가라도 들어와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지금 강릉에 현실 단가가 15톤 트럭이 하루 50만 원으로 책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견적서를 동부건설에서 받으니까 40만 원까지를 받았습니다"

그마저 공사가 중단되자 영세 하청업체들은 50억 원 넘게 대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재봉 / 덤프트럭 기사]
"할부도 밀려있고 차를 뺏기게 생겼어요 지금. 기름도 주유소에서도 돈을 받아야 주는 거 아닙니까. 그런 부분들이 다 연쇄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으니까 저 하나만 힘든 게 아니고.."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저가로 시공된 공사는 부실 위험성이 높다는 겁니다.

지난 2월과 3월 잇따라 붕괴사고가 발생한 서울 사당동 체육관 건설현장과
경기도 용인 교량 건설현장, 모두 최저가 낙찰제로 발주된 공사였습니다.

두 사고 모두 부실 시공과 관리소홀로 참사가 발생했는데, 건설업계에선
이런 사고가 최저가낙찰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건설사 관계자]
"어떻게든 이걸 만들어야 되는데 그냥 조금 주면 조금 주는 대로, 많이 주면 많이 주는 대로 하는 거예요"

[김영덕 박사 / 건설산업연구원]
"최저가 낙찰제를 통해서 충분히 품질이 확보가 되지 않고, 또 저가의 자제들이 사용되면서 부실 공사들이 발생된다면 그 피해는 그 그 시설을 이용하는 국민들의 피해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도 이같은 문제점을 인정하고 담합을 조장하고 부실 시공을 유발할 수 있는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있습니다.

1사 1공구제와 최저가 낙찰제, 실적공사비제는 폐지하고 건설사의 시공 능력과 기술자 수, 자금력 등을 총괄 평가하는 '종합심사낙찰제'를 도입하기로 한 겁니다.

[김정희 / 국토교통부 건설경제과장]
"예산 절약이나 그런 틀에 갇혀서 저품질의 공사와 불공정을 야기시키고 담합을 유발하고 하는 그런 악순환의 구조에서 제대로 된 제값주고 제대로 일시키기로 가는.."

지난달 동티모르 정부 관계자들이 현대건설과 국토부를 방문했습니다.

8천억 원 대 동티모르 항만공사에서 1순위 업체로 선정된 현대건설이 담합으로 제재를 받자 내용을 확인하러 온 것.

국내에서의 담합이 해외 사업의 수주 차질로 불똥이 튀고 있는 겁니다.

[한태욱 교수 / 동양미래대 경영학부]
"'왜 벌금을 무느냐' 하는 식으로 이유를 묻고 있거든요. 결국은 담합이라는 부분이 나온다고 하면은 해외 발주처에서 좋아하겠습니까? 국가적인 측면이나 기업적인 측면에서는 절대적으로 불이익이 있을 겁니다"

여기엔 건설사의 잘못에 더해 정부의 불합리한 발주 방식과 입찰 제도가 문제를 키웠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정부가 담합을 잇따라 적발하고 제재하는 데 건설사들이 볼멘소리를 하는 이유입니다.

[건설사 관계자]
"정부의 발주 형태나 제도적 부분이나 다 담합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무조건 그때 잘못했으니까 원칙대로 벌을 다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벌을 다 받았습니다. 앞으로 더 태산이 남아있는 거죠. 해외 수주 못하게 된 거.."

앞선 기술과 성실함으로 '중동신화'를 만들었던 우리 건설업계의 성과들은 말그대로 '과거의 영광'일 뿐일까

눈 앞의 이익을 노린 건설사들의 담합, 이를 묵인하고 때론 부추겼던 건설정책은 결국 부실과 만성적인 경영위기로 이어지며 스스로의 목을 조이고 있습니다.

낡은 제도도, 나쁜 관행도 새로 일구고, 다시 지을 때입니다.

 

기사입력 2015-05-18 09:28송양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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